뭘 좀 먹어야겠는데 카페 란트만Café Landtmann이 호프부르크 궁에서 멀지 않다. 빈 사람들에게 카페는 2의 집이라 할 만큼 일상의 공간이라 한다. 그래서 어딜 가나 카페가 흔하고 유서 깊은 곳도 여럿이다. 1873년 문을 연 카페 란트만도 그런 곳 중 하나다. 이 곳은 배우들의 카페’, ‘정치인들의 아지트’, 등으로 불렸는데 주변 환경을 보면 이해가 쉽다. 카페 란트만은 부르크 극장Burg theater 바로 옆에 있는데, 이 극장이 왜 그 자리에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 지역을 처음 개발할 때 지금의 라트하우스플라츠Rathausplatz시청 광장인 큰 지역을 가운데에 비워두고, 주위 네 개의 건물이 서로 마주 보도록 계획했다. , 서쪽에는 시청을 배치하고 맞은편에 부르크 극장을, 또한 남쪽에는 국회의사당을 세우고 북쪽에는 빈 대학을 지었다. 이렇게 사각형의 네 변을 차지한 건물은 각각 행정, 입법, 학문, 예술을 의미한다. 보통은 시청이나 국회의사당이 중앙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고 이런 구성을 한다 해도 예술이 나란히 한 축을 담당하는 것이 흔치는 않아 보인다. 예술의 나라, 오스트리아답다. 그렇게 세워진 부르크 극장에서는 최고의 연극이 공연되고 배우들뿐 아니라 연출가, 작가들은 카페 란트만에서 작품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카페 란트만은 나머지 세 축의 정치가와 학자들에게도 담론의 장소일 것이다. 일요일 오전이라 그런지 조식을 즐기는 손님들이 많아 보였다. 빈의 카페들은 대부분 커피와 디저트뿐 아니라 식사도 가능한데 아침에는 빵과 햄, 치즈, 등의 기본적인 메뉴들을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아침 겸 점심이 되어야 하니 제대로 식사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여행객 정체성에 충실하게 이 곳의 대표 메뉴로 주문했다. 아펠스트루델Apfelstrudel, 여러 겹의 페이스트리에 사과를 넣은 일종의 애플파이다. 커피는 이전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크림이 없는 멜랑주Melange를 시켰더니 아주 잘 어울렸다. , 빗방울이다. 비를 피해 자리를 옮겨 앉았다. 통유리로 천장과 외벽을 꾸민 반실외 공간이다. 비가 유리에 부딪쳐 내는 소리와 자국이 예쁘다. 여행 내내 하늘이 맑아서 감사했는데 돌아가는 날 처음 내리는 비는 그것대로 좋다. 옆 테이블에는 부자로 보이는 이들이 앉았는데 아들이 먹고 있는 아펠스트루델이 우리 것과 조금 다르다. 메뉴판을 다시 보니 아펠스트루델은 그냥 나오기도 하고 커스터드를 함께 주문할 수도 있는 거였다. 커피, 디저트, 식사 등 메뉴판이 여러 종류인데 우리가 처음 앉았던 자리에는 아마도 이 메뉴판이 빠져 있었던 것 같다. 배는 이미 부르지만 너무 맛있어 보여 과감히 추가 주문했다. 비와 커피와 뜨거운 커스터드를 입은 파이, 빈에서의 마지막 식사도 만족스럽다.

 

카페 란트만을 자주 찾은 명사들은 한 둘이 아니지만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가장 유명하다. 프로이트는 진료를 마치면 그의 병원에서 30분이면 걸어 올 수 있는 이 곳으로 와서 시간을 즐겼다고 한다. 그는 이 곳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어떤 이야기를 나눴을까, 진료실의 의사와 카페의 손님은 비슷할까, 또는 전혀 다를까 궁금해 지기도 한다. 프로이트의 병원은 박물관Sigmund Freud Museum으로 이름 붙어 개방 중인데, 멀지 않다고 하니 정신분석학에도 호기심이 있다는 동행은 그를 놓치고 가면 안 되겠다며 의지를 불태웠다. 일반적인 주택가 골목이지만 빨강 바탕에 ‘FREUD’의 흰색 글자가 크게 쓰여 있어 찾기에 쉬었다. 진료를 보듯 방문객들을 수에 제한을 두고 입장시키고 있었는데 동행은 순서를 기다리는 것마저도 설레는 것 같았다. 여행이 끝에 오다 보니 나는 또 뭔가를 집중해서 보는 것이 내키지 않아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동행이 관람을 마치고 나오면 더는 지체 없이 공항을 향해야 한다. 이 때쯤, 그러니까 돌아갈 시간이 되었을 때, 드는 생각이 그 여행을 말해 주는 것 같다. 보고 싶은 것을 다 못 본 것 같아 짧은 기간이 아쉽기만 할 때도 있고, 어느 한 장면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꼭 한 번 다시 재회하리라 다짐하기도 한다. 몸과 마음이 피곤하여 그저 얼른 집에 도착하길 바랄 때도 있다. 프로이트 병원 앞 벤치에 앉아 든 생각은 너무 아무렇지 않다는 거였다. 지극히 평범한 거리는 관광객이 몰리는 곳도 아니어서 오가는 사람들도 많지 않고 조용했다. 일주일 빈에 있었을 뿐인데 이 보통의 빈이 이렇게 익숙할 수 있나 싶었다. 재력과 여력이 된다면 좀더 길게 머물러도 좋을 도시란 생각이 들었다. ‘여행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마음 움직이는 대로 가다 말다가 될 것 같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 그림이 보고 싶으면 미술관을 찾고, 공원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종일 시간을 보내다 저녁에 오페라 극장으로 향할 수도 있다. 빈은 이런 휴식을 위한 최적의 도시 같다. 미술관과 극장이 많기도 하지만 특정 장소가 아니어도 어딜 가나 예술을 접할 수 있고 뚜벅이들에게는 간과할 수 없는 교통 시스템도 잘 되어 있는 편이다. 독일어를 사용하지만 그렇다고 영어가 통하지 않는 곳도 아니어서 크게 불편하지도 않다. ‘살고 싶다.’는 아닌데 한 달쯤은 지루함 느끼지 않고 평화롭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도시, 내가 느낀 빈이다. 동행이 만족한 표정으로 나왔고 우리 빈 일정은 모두 끝났다. 나중 언젠가 한 달쯤 빈에 머무는 호사를 누릴 날을 감히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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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을 떠나는 날이다. 우리의 계획된 마지막 일정은 궁정성당 미사에 참석하는 것이다. 나는 교회에 다니고 동행은 가톨릭이니 여행을 떠나 왔어도 주일을 지키고 싶었다. 그리고 매 주일 궁정성당 미사는 빈 소년합창단Wiener Saengerknaben이 성가를 부른다. 세일러복을 입고 천사의 목소리를 내는 아이들, 그 빈 소년합창단 말이다.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더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겠다. 빈 소년합창단은 1498년 황제에 의해 창설되어 5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당시 미사는 여성들이 노래 부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프라노와 알토 파트를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소년들에게 맡겼다. 난이도 높은 성가를 소화하기 위해 합창단원들은 합숙 생활을 하면서 음악 훈련을 받았다. 1918년 독일 사회민주혁명으로 한 때 활동이 중단되기도 했으나 1924년 다시 조직된 이후 미사나 종교 행사 외에 일반 음악회 공연도 하기 시작했다. 21~25명으로 구성된 4개 팀이 있어, 한 팀은 빈에서 미사에 참석하고, 또 한 팀은 연주회를 준비하며, 남은 두 팀은 해외 순회 공연을 한다. 그래서 한국에서 공연을 볼 수 있는 기회도 종종 있지만 합창단의 존재 이유이자 여전히 그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인 성가대로서 그들을 만나는 것은 특별한 일임에 틀림 없다. 미사에 늦지 않기 위해 서둘러 체크아웃을 하고 호프부르크 궁Hofburg으로 향했다. 호프부르크는 1220년경에 처음 세워진 합스부르크 왕가의 궁전으로 빈의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이지만 우리는 궁전 구경은 따로 하지 않고 미사가 열리는 곳을 찾아 직진했다. 제대로 찾은 게 맞을까, 분명히 우리 같은 관광객이 많을 듯 한데 이렇게 아무도 없을 수 있을까, 의심을 품은 채 건물로 들어섰고 미로 같은 복도를 헤맸다. 다행히 전혀 엉뚱한 곳을 헤맨 것은 아니었는지 잘 당도하였는데 도착해 보니 정문은 우리가 들어선 입구 반대편이었다. 역시 그 곳은 사람들이 많았다. 정기적으로 드리는 미사이므로 별도의 입장료는 없지만 관광객이 몰리기 때문에 자리는 가격의 차이를 두고 예약을 받는다. 앞의 빈 필과 오페라처럼 이번에도 동행 덕을 보았다. 2층 사이드 맨 앞자리였는데 몸을 조금만 구부리면 제단도 잘 보이고 무엇보다 소년들이 자리한 곳이 2층 뒤편이었기 때문에 힐긋 노래하는 모습을 훔쳐 볼 수도 있었다. 가톨릭 미사는 처음이었다. 기독교도 예배 절차가 간단하지 않은 편이지만 가톨릭이 좀더 복잡하다고 알고는 있었는데 생각보다 더 생소한 의식들이 많은 듯 했다. 낯설었지만 형식이 만들어내는 경건의 공기가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예배가 라틴어로 진행되어 정말 중세 시대에 온 기분이었다. 몇몇 기도문의 독일어 번역판까지 준비했던 동행에게는 안타까운 일일 수도 있었지만 라틴어 예배는 동행에게도 새로운 느낌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예배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소년합창단의 성가였다. 곡은 모차르트의 F 장조 미사곡Missa brevis, F-Dur, KV192 ‘’Kleine Credo-Messe이었다. ‘청아하다라는 단어는 이런 때에 쓰는 거구나 싶었다. 정말 맑고 아름다웠다. 전 세계에 문이 열려 있는 것은 알았지만 동양인이 생각보다 많아서 놀라웠다. 연예인 만드는 엄마들보다 극성의 수준이 배는 더 하지 않을까 잠깐 생각했다. 미사가 끝나자 소년들이 제단 앞으로 나와서 한 곡을 더 부른다. 합창단을 보러 온 관광객들을 위한 성당 측의 배려라고 한다. 급하게 스마트폰을 꺼냈다. 팬 서비스에는 팬다운 반응을 보여야 하는 법, 예쁜 소리 잘 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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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은 재미 없기가 쉽지 않은 장소다. 벼룩시장이라면 더욱 그렇다. 시내에 있는 재래시장, 나슈마르크트Naschmarkt에는 매주 토요일 벼룩시장이 열린다. 본래부터 자리하고 있는 각종 식료품점과 식당 골목만도 규모가 꽤 크고 그 뒤로는 오만 잡동사니가 있다. 어디 쓸 데는 없어 보이는 물건들이지만 눈요깃감으로는 손색이 없다. 그릇을 파는 곳이 여럿 있었는데 군데군데 이가 빠진 것도 있지만 간혹 새 것처럼 깨끗한 것들도 있다. 밝은 원색의 기하학 무늬가 예쁜 도자 다기는 욕심이 나기도 했는데 한국까지 무사히 가져갈 자신이 없어 포기했다. 전자 용품을 늘어놓은 좌판도 보인다. 과연 동작을 하긴 할까 싶은데 간절히 필요한 물건에 눈이 가는 법, 서비스 센터에서 규격이 맞는 어댑터를 구하지 못했던 동행은 모양도 다양한 어댑터 바구니를 뒤적거리기도 한다. 내 걸음을 잡은 것은 구석 넓지도 않은 공간에 늘어져 있었던 장신구들이었다. 수가 많진 않았지만 눈에 뜨이는 것들이 있었다. 이것저것 고르다 큐빅 팬던트 목걸이와 하트모양 비즈를 여러 개 엮은 팔찌로 최종 낙점했다. 5유로, 비싸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흥정이 빠지면 심심하니 깎아 줄 수 없는지 물었는데 흔쾌히 둘을 8유로에 주겠다고 한다. 2유로가 큰 돈은 아니지만 뭔가 굉장히 싸게 득템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시장이 또 좋은 것은 군것질거리가 많다는 것, 우리는 오스트리아 전통 디저트라고 하는 젤튼zelten을 사 먹었다. 소가 들어있는 빵인데 적당히 딱딱한 빵의 질감과 부드러운 소가 잘 어울렸다. 시장에 막 도착했을 때보다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 활기가 넘치는 시장을 빠져 나와 케른트너 거리로 갔다. 목적은 자허 토르테Sacher Torte였다. 자허 토르테는 빈을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은 먹어봐야 한다는 카페 자허Café Sacher의 케이크이다. 시장에서 젤튼을 먹고 얼마 되지 않아 호텔 카페의 케이크라니, ‘체험 극과 극같지만 빈에 머무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다음으로 미룰 수 없었다. 빈에서 마시는 비엔나커피도 다음 기회가 없을 것 같아 함께 주문했다. 그러나 이것은 실수였다. ‘비엔나에는 비엔나커피가 없다.’는 것은 알려져 있고 한국에서 비엔나커피라고 하는 것은 아인슈패너Einspaenner로 커피 위에 휘핑크림이 함께 나오는데 얹는 수준을 넘어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몰랐던 게 아닌데 나는 왜 초콜릿 케이크와 함께 이것을 주문했을까 자책했다. 자허 토르테는 초콜릿 케이크라는 본질에 충실하게 달았다. 너무 맛있지도, 그렇다고 실망할 맛도 아니었지만 아인슈패너와 어울리지 않는 것만은 확실했다.

 

다음 날 한국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더 미룰 수 없는 것이 또 있었다. 바로 쇼핑, 다른 것은 몰라도 쇼핑을 즐기지 않는다는 것은 동행과 내가 확실히 일치하는 점이었지만 여행을 떠나온 이로서 지인들을 위한 최소한의 쇼핑이 필요했다.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빈에 다녀왔다는 기념이 될 법한 것들로 골랐다. 보통 회사 동료들을 위해서는 면세점 초콜릿으로 대신 했었는데 이번엔 오스트리아 과자인 마너Manner를 돌릴 것이다. 꼭 챙겨야 할 사람들 것만 샀는데도 부피가 제법 된다. 괜스레 짐을 잘 쌀 수 있을지 걱정되기도 해서 호텔로 가서 돌아갈 준비를 먼저 했다.

 

마지막 밤이다. 빈을 열심히 걸었던 헌 운동화를 포함하여 버릴 것은 빼고 그 자리는 빈에서 구입한 물건들로 채웠다. 돌아갈 짐을 꾸려 놓으니 이제 정말 아쉬워지려고 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묶고 있는 호텔 카페에서 동행과 맥주 한 잔으로 마지막을 기념했다. 무엇이 가장 좋았는지,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어떻게 빈을 기억할 것 같은지 얘기했다. 또 여행 중 속상한 것이 있지는 않았는지, 서로에게 말 못한 채 화가 난 순간은 없었는지도 묻고 답했다. 그리고 빈을 거니는 동안 나의 동행이 되어 주어 고마워’, 짧은 메시지와 함께 벼룩시장에서 득템한 팔찌를 동행에게 건넸다. 팔찌를 고를 때 비즈가 몇 개인지 세더니 묵주라고 알려 주었었다. 모른 채 내가 팔찌로 찼을 수도 있겠지만 가톨릭인 동행에게 선물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 또한 전하고 싶었다. 언젠가 둘의 마음이 또 같은 곳을 향할 때 서로에게 기꺼이 동행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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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에서 에로이카하우스는 연이 닿지 않았지만 테스타멘트하우스Testamenthaus유서의 집은 운이 맞아 연이 된 경우였다. 이름처럼 베토벤의 유서가 있고 그 외에도 그의 죽음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유물들이 있는 곳이라 꼭 가 보고 싶었다. 그런데 보수 때문에 임시 폐관 중이라는 얘기가 인터넷에 심심찮게 보였다.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폭풍 검색을 하다 얻은 희소식은 보수 후 10 1일자로 재개관한다는 것이었다. 10 2일 비행기로 빈을 떠나는 일정이었던 우리에게 선물 같은 날짜였다.

 

테스타멘트하우스는 하일리겐슈타트Heiligenstaedt에 있다. 빈 북서쪽 교외에 있는 지역으로 시내에서 트램을 타고 종점까지 간다. 거리에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 한적한 마을이었는데 오히려 박물관에는 우리처럼 재개관일을 맞춰 방문한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이 곳의 유물은 여느 음악가의 박물관과는 조금 달랐다. 물론 친필 악보도 있고 베토벤의 작품을 들어 볼 수 있는 오디오 시설도 있다. 그러나 이 곳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데스마스크였다. 살면서 숱하게 보아 온 베토벤의 얼굴은 조금 무섭게까지 느껴지는 센 모습이다. 그런데 그의 데스마스크는 양볼이 움푹 파였고 입은 힘없이 다물고 있다. 너무 초라해서 위대한 음악가의 것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인상이었다. 함께 전시된 베토벤의 유서는 내용이 짧지 않고 글씨도 또렷하다. 그는 유서를 여러 통 썼었다고 하던데 죽음 앞에서 한없이 무력했던 그는 어떤 마음으로 유서를 썼었을까 생각해 본다.

 

베토벤은 20대 후반 청력에 이상이 생겼고 의사의 처방으로 요양차 이곳, 하일리겐슈타트에 왔다. 이곳에는 베토벤이 즐겨 걸은 길이라 베토벤강Beethovengang이라는 이름이 붙은 특별한 산책로가 있다. 작은 시내가 흐르고 나무가 많아서 제대로 숲 분위기를 낸다. 난청 치료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요양의 장소로는 최적이었을 것 같다. 그리고 예술가들은 영감을 받기도 할 것이다. 베토벤 전원 교향곡Symphony [No. 6] in F Major, (Pastorale), Op. 68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놀라운 것은 당시 베토벤은 들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들리지 않는 대신 나머지 감각으로 숲을 느끼고 그것을 실제보다 더 생동감 있게 음악으로 옮긴 것이다. 그는 이 길을 걸으며 바람에 잎이 흔들리고 새가 우는 것을 보고 마음으로 그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피아노 앞에서는 들을 수 없음에 괴로웠을 것이다. 그의 천재성에 대한 감탄은 진부하지만 반복할 수 밖에 없었고 그의 고통을 짐작하기는 여전히 어려웠다.

 

하일리겐슈타트는 호이리게Heurige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호이리게는 그 해에 나온 새 포도주를 말한다. 문에 소나무 가지가 걸린 곳이 호이리게를 취급하는 주점인데 워낙 많다. 인기가 있어 보이는 한 집으로 들어갔더니 제대로 골랐는지 예약 외 손님은 받을 수 없다고 해서 하는 수 없이 근처 아무 집으로 갔다. 아무데로 간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을까, 호이리게는 시큼하기만 할 뿐 정말 맛이 별로였다. 포도 넝쿨로 꾸며진 테라스가 운치는 있어 보였지만 깔끔하지는 않아서 딱 한 잔만 마시고 나왔다.

 

빈에는 훈데르트바서를 만날 수 있는 곳이 앞서 얘기한 두 곳 외 한 군데 더 있다. 슈피텔라우Spittelau쓰레기 소각장 겸 열 발전소다 하일리겐슈타트를 오가는 길에 지나는 위치여서 시내로 돌아갈 때 들렀다. 금테를 두른 굴뚝이 높게 솟아 있어 바로 찾을 수 있다. 벽면은 체스판 모양의 바탕에다가 알록달록한 창문들로 꾸며졌다. 일반적인 쓰레기 소각장이었던 이곳은 훈데르트바서의 손을 거쳐 어린이 테마파크 같은 외관을 갖춘 자연친화적 소각장으로 바뀌었다. 실제 여기는 빈 시내 쓰레기의 3분의 1을 소화하면서도 배출하는 다이옥신 양은 1년에 0.1그램 정도라고 한다. 쓰레기 소각장이라고 하면 님비NIMBY 현상부터 염려되는데, 친환경적인데다 이렇게 멋지고 예쁘다면 오히려 반길 것이다. 훈데르트바서 같은 예술가가 있는 빈이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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쇤브룬 궁전Schloss Schoenbrunn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곳이다. 마티아스Kaiser Matthias1612~1619재위 황제가 사냥 중 이 곳에서 샘을 발견한 후 거의 100, 레오폴트 1Kaiser Leopold I1658~1705재위 황제 시대,아름다운 샘’, 'Schoenbrunn'이라 이름 붙은 궁전이 지어졌다. 이 후 마리아 테레지아의 명령에 따라 궁전을 확장, 지금의 화려한 모습이 완성되었다. 쇤부른 궁전이 의미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1762년 당시 여섯 살 된 모차르트가 마리아 테레지아를 위해 피아노 연주를 한 곳이고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1805년부터 4년 동안 거주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프란츠 요제프1Franz Joseph 11848~1916재위 황제가 1830년 이 궁전에서 태어났고 66세의 나이에 같은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쇤브룬 궁전은 그의 아내였던 엘리자베트씨씨Elisabeth ‘Sissi’ von Wittelsbach 황후가 사랑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엘리자베트는 합스부르크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왕비로 전해지지만 그녀의 삶이 행복하지는 못했다. 황제는 평생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녀의 자유분방한 성격이 엄격한 황실과 맞지 않았다. 아들 루돌프Rudolf 황태자는 자살을 했고 이후 그녀는 외국을 떠돌며 생활하다가 결국 무정부주의자의 암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렇듯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기에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나 책 등이 많이 나왔는데 그 중 뮤지컬 [엘리자벳Das Musical Elisabeth]은 한국에서 크게 흥행을 했다. 뮤지컬 팬들에게는 그녀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쇤브룬이 조금 더 특별한 곳이 되는 듯 하다. 그러나 온갖 뮤지컬을 섭렵했던 시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작품을 보지 못했다. 작품이 한국에 소개되기 전 빈 공연 녹화 영상은 볼 기회가 있었는데 졸음을 참지 못했던 기억이다. 그래서인지 나에게 쇤브룬은 압도적인 크기와 화려함이 주는 인상 그 이상이 되지는 못했다. 오디오 가이드의 내용이 충실해서 각 방이 꾸며진 역사적 배경, 방 주인들의 성향, 등은 설명이 충분히 되었는데도 공감으로 이어지지는 않아서 과거 어느 왕국의 화려했던 시절을 엿보는 것 외에 쇤브룬만 주는 감동은 아니었다. 나에게 씨씨의 일생은 역사적 사실 그 이상은 되지 않는 셈이다.

 

쇤브룬 궁전 관람 티켓은 볼 수 있는 지역마다 단계를 두어 종류가 여럿이다. 빈 전체를 볼 수 있는 곳에 글로리에테Gloriette라는 개선문이 있다는 정원이 파리Paris의 베르사유Chateau de Versailles에 버금간다고 알려져 있지만 우리는 글로리에테를 포함하지 않은 티켓이었다. 그렇지만 무료로 공개되는 정원도 있는데, 이 곳만도 엄청 넓고 잘 꾸며져 있어서 높은 지대에서 내려다 보면 황금빛이 찬란한 궁전 본 건물을 배경으로 장관이 펼쳐지기에 아쉬울 것은 없었다.

 

궁전 전 구역을 다 구경하지 않았음에도 두어 시간이 훌쩍 흘렀다. 쇤브룬은 빈의 남서쪽 외곽이다. 첸트랄프리드호프에서 시작한 하루의 경로를 되짚어 보면 남동쪽 끝에서 서쪽 부도심, 하이든하우스,를 거쳐 북쪽, 에로이카하우스,로 갔다가 다시 남서쪽으로 온 것이다. 철저하게 계획 세워 움직이지 않은 탓에 맞닥뜨린 비효율의 실상 같았다. 한편 그간 너무 효율적으로 가까운 곳들만 골라 다닌 결과일 수도 있었다. 효율성을 굳이 따질 필요는 없는 일이었지만 그렇게 멀게 다니는 동안 전혀 식사를 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배고픈 데다가 몸은 지쳤다. 얼른 먹고 얼른 쉬고 싶었다. 숙소 근처 중앙역 푸드코트에서 빠른 음식, 패스트푸드,로 배를 채웠다. 독일의 해산물 전문 레스토랑 프랜차이즈, 노드제Nordsee. 검색해 보니 독일 대표 레스토랑 체인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에만 400여 개의 지점이 운영 중이고, 한국에 들여오고 싶은 프랜차이즈로 소개하고 있는 블로그도 있었다. 새우튀김은 맛있는 편이었고 참치샌드위치는 그냥 무난했다. 정확히는 한국에 들여오고 싶은 곳으로 굳이 소개하고 싶은 곳까지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얼른 먹고 얼른 쉴 수 있었으니 그럼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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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날 슈테판광장Stephansplatz 근처 브람스의 옛 하숙집을 찾았었으나 현판만 있을 뿐 내부를 개방하지 않는 일반인이 사는 주택이었다. 크게 실망할 일은 아니다. 그 많은 음악가들이 머물렀던 곳들을 모두 기념관으로 만들 수는 없을 것이므로 누가 언제 이 곳에 살았다.’라는 표시만으로도 고맙긴 하다. 그렇다고 해도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어서 찾은 곳이 하이든하우스다. 하이든하우스는 하이든이 죽기 전 12년 동안 살았던 집인데, 방 하나가 브람스로 꾸며져 있다고 했다.

 

실제 살았었던 주택을 개조한 기념관의 경우, 주택가 집들 중 한 곳일 것이므로 찾기가 쉽지 않은데, 빈은 유적지마다 오스트리아 국기로 ‘Wien’‘W’ 모양을 만들어 표시해 두어 비교적 헤매지 않을 수 있다. 서역Westbahnhof 근처 평범한 주택 단지에서 하이든하우스도 W 깃발 덕에 어렵지 않게 찾았다. 전시물이 많지는 않아서 피아노와 악보, 데스마스크 정도였다. 그리고 브람스의 방은 더 단출했다. 초상화가 있어 브람스 코너인 줄 알지 그마저도 없이 대강 훑어보면 브람스 유적인 줄도 모를 것 같다. 스물아홉 빈에 와서 죽을 때까지 최고의 자리를 지키며 빈에서 성실히 음악활동을 했다고 하는데 그런 이력에 비하면 볼 것이 너무 적지만 전 날의 아쉬움은 그래도 조금 달랜 셈이다.

 

베토벤의 경우 가난한 음악가였던 탓에 빈에서만 80번 가까이 하숙집을 옮겼다고 하는데 그 중 의미가 있는 몇 곳이 개방 중이다. 그 중 영웅 교항곡Symphony [No. 3] in E-flat Major, (Eroica) Op. 55' 작곡한 곳인 에로이카하우스Eroicahaus를 찾아 갔다. 그런데 문이 잠겨 있었다. 금요일에만 운영한다고 들어서 맞춰 간 거였는데, 그 뿐만 아니라 예약제였다. 우리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던 것이다. 베토벤 때문에 빈에 온 동행은 이대로 그냥 돌아갈 수 없다며 안내판에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 사정했다. 의미가 제대로 통하긴 하는 것인지, 영어와 독일어가 섞이고 전화이니 소용없을 것인데 보디랭귀지까지 동원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간절함은 전달되지 못했거나 전달은 되었으나 원칙에 의거하여 거절당했다. 어쩔 수 없이 앞마당 모습만 카메라에 몇 컷 담고는 돌아왔다. 동행은 야속해 했고 옆에서 보는 나도 너무 속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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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훈데르트바서 때문에 빈을 찾았다면 동행의 이유는 베토벤이었다. 빈은 베토벤 외에도 많은 음악가들이 활동했던 도시라 동행의 여정은 주로 그들의 흔적을 쫓는 쪽이었다. 그리고 여행 중 어느 날, 우리는 그 흔적들의 종착지 같은 곳으로 향했다. 음악가들이 잠들어 있는 곳, 첸트랄프리드호프Zentralfriedhof, 중앙공동묘지다.

 

시내에서 꽤 떨어져 있기 때문에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야 한다. 그러나 지루하진 않았다. 창 밖으로 전형적인 교외의 아침 풍경, 낮고 아담한 건물과 조용한 거리,를 보고 있으니 오히려 차분해지는 것이 죽은 영혼들을 마주할 마음가짐을 준비할 수 있어 고마웠다. ‘fried’평화, 자유를 뜻하고 ‘hof’궁전, 저택을 말한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묘지를 평화와 자유를 위한 안식처라는 뜻에서 프리드호프라고 부른다고 한다. 묘지 제2문에 들어서면 길 끝에 성당이 보이고 양 옆으로 구획된 묘역들이 있다. 32구역, 음악가의 묘역이다. 익숙한 이름들이 보인다. 1874년 첸트랄프리드호프가 개장했을 때, 시 당국은 빈 시내에 흩어져 있는 유명인사들의 묘를 이 곳으로 이장했다. 그 때 베토벤과 그를 흠모하여 그의 옆에 묻어 달라유언한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의 묘지도 옮겨졌다. 브람스 역시 베토벤 곁에 눕고 싶어한 그의 바람대로 근처에 묻혔다. 모차르트 묘비는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묘 사이에 있는데 허묘다. 그는 전염병으로 죽어 커다란 구덩이에 여러 사람들과 함께 묻힌 터라 묘지가 따로 없는데 그의 추종자들이 묘비만을 여기에 세웠다. 묘비들의 모양은 다양한데 상대적으로 베토벤의 것은 단조롭다. 조각상커녕 흔한 얼굴 부조도 없이 오각 비석에 금색 하프 모양 장식이 전부다. 그런데 그래서 더 돋보인다. ‘베토벤이란 이름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냐고 되묻는 듯 하다. 음악가의 묘역을 나와 성당에 들를 겸 묘지를 천천히 산책했다. 묘지라고 해서 음침하거나 섬뜩하지 않다. 엄숙함이 있을 뿐 공원에 가깝다. 게다가 그 날은 날도 너무 좋았다. 파란 하늘과 푸른 나무, 돔형 성당을 한 컷에 담으면 막 찍어도 작품 사진 나올 것 같다. 이 곳에 계신 분들의 평화로운 안식은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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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 Wien은 매주 목요일 9시까지 연장 운영하기 때문에 저녁 시간을 활용할 참이다. 그 때까지 서너 시간 남았는데 따로 무엇을 할 지 정해 놓지 않았기에 일단 시내로 갔다. 점심 때가 한참 지나 출출한데 피그뮐러Figlmueller가 근처인 거 같다. 피그뮐러는 슈니첼 전문 레스토랑인데 네이버naver에서 무수히 접할 수 있는 빈의 맛집이다. 빈 자리가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손님이 많았는데 반 이상이 한국인이다. ‘한국인에게유명한 집인 셈인데 숨겨진 진짜 맛집을 알아 볼 뾰족한 방법이 없으니 낮은 성공률에 기대기보다 실패할 확률을 줄이는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슈니첼은 아주 맛있지도, 아주 맛없지도 않은 정도였는데 듣던 대로 양만큼은 확실히 많아서 배는 충분히 불릴 수 있었다.

 

미술사 박물관으로 가기 전 월요일 휴관인 줄 모르고 갔다 헛걸음을 했던 제체시온Secession에 들렀다. 제체시온은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빈 분리파의 회관 건물로 그들의 신전 같은 곳이다. 네 개의 작은 사각형 탑이 각 꼭지점 기둥이 되어 가운데 구를 받치고 있다. 구는 월계수 잎을 형상화한 금빛 장식으로 되어 있어 인상적인 외관을 만든다. 정문 위에는 ‘Der Zeit ihre Kunst, der Kunst ihre Freiheit.’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그 예술의 자유를.라고 적어 놓았다. 분리파의 신념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새겨 두고 싶은 문장이다. 미술 작품이나 유적들을 전시하고 있는 곳도 아닌데 내부를 보겠다고 굳이 다시 찾은 건 베토벤 조각상이 있다고 들어서였다. 1898년 개관 후 1902년 제14회 분리파 전시회가 드디어 자신들의 신전에서 열렸고 그들은 신으로서 베토벤을 선택했다. 독일 조각가 클링거Max Klinger가 베토벤 상을 만들어 전시했고 이를 기념해 클림트는 전시실에 [베토벤 프리즈the Beethoven Frieze]를 그렸다. 그 조각상과 그 벽화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나 9.5유로의 적지 않은 입장료를 지불했건만 베토벤 상은 전시되지 않고 있었고 [베토벤 프리즈]는 기대만큼 감동되지 않았다. 베토벤 교향곡 제9 (합창) 4악장 환희의 송가Ludwig van Beethoven Symphony [No. 9] in D minor, (Choral), Op. 125: “Ode to Joy”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라는데 클림트의 표현 세계는 나의 이해 수준보다 아무래도 한참 위에 있나 보다.

 

링슈트라세를 지나다 보면 남쪽으로 마리아 테리지아 상이 있다. 광화문의 세종대왕만큼 위엄이 있다. 그리고 여제를 중심으로 양쪽에 크고 화려한 쌍둥이 건물이 있는데 각각 자연사 박물관Naturhistorisches Museum Wien, 미술사 박물관이다. 미술사 박물관의 주요 소장품은 합스부르크 황실의 것으로 소장품의 양과 질이 세계적 수준이라 들었다.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도 제공되고 있어서 의욕적으로 관람을 시작했다. 그러나 의욕은 빠르게 약화됐다. 작품이 많다는 걸 생각하지 못하고 초반에 너무 열심히 보려 한 탓에 체력이 급격하게 소진된 것이다. 게다가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는 타 언어의 것보다 가이딩하는 작품 수가 현저히 적었다. 의미도 잘 모르면서 보려 한 건 무모한 욕심이었다. 고대 이집트부터 중세, 근대까지의 작품들을 연대순으로 전시하고 있었는데 과감히 시대들을 건너 뛰면서 설명이 있는 작품들 중심으로 보니 훨씬 나았다. 유명한 [바벨탑The Tower of Babel]을 비롯해 브뤼겔Pieter Bruegel the Elder의 작품들이 많았는데, 그의 풍속화들은 친근한 느낌이 들어 좋았다. 반면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의 사계 중 [여름Summer]과 화가는 기억나지 않지만 비슷한 화법으로 그린 생선 정물화가 있었는데 인상에 남는 것만은 확실하지만 역시 내 취향에는 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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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사이 랩톱 어댑터가 명을 다한 탓에 아침 일찍 서비스 센터를 찾아 시내로 향했던 동행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훈데르트바서하우스 건너편, 바로 보이는 트램 정류장으로 무작정 가서 확인하니 다행히 프라터Prater까지 가는 노선이 있다. 프라터는 오락장이나 유원지를 뜻하는 단어이나 오늘날 프라터는 빈에 있는 프라터 공원Wiener Prater를 일컫는 고유명사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를 촬영한 곳으로 유명해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는데, 분명 재미있게 본 영화임에도 나는 영화 속 프라터 장면이 기억에 없다. 그래서 염두에 둔 곳은 아니었으나 초행자의 약속 장소로 대관람차만한 게 없다며 핑계를 삼았다. 프라터가 종착지였기에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웬걸 트램에서 내리니 사방이 잔디 벌판이다. 사냥터였다고 하더니 아무래도 너무 깊숙이 왔나 보다. 잠시 당황했는데 대관람차가 프라터의 상징답게 멀게나마 보인다. 조급한 마음에 방향을 찾는 데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걸었다. 놀이공원 특유의 소음이 가까워지는 걸 보니 제대로 왔다. 입구를 찾느라 조금 더 헤맨 후에야 동행에게서 전화가 왔었다는 걸 알았다. 왜 연락부터 할 생각을 못했는지 자책하고, 놀이공원은 적절한 약속 장소가 아니었다고 후회하고, 무엇보다 걱정하며 기다렸을 동행에게 많이 미안해 하며 무사히 동행을 다시 만났다. 둘 모두 놀이기구를 즐기는 편은 아니어서 바로 공원을 빠져 나왔다. 수선을 떤 후라 번잡한 곳에 더 있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그래서 간 곳은 알테 도나우Alte Donau, 요한 슈트라우스 2Johann Strauss ll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An der schoenen blauen Donau]의 그 도나우 강이다. 왈츠 선율로 옮겨질 만큼 아름다운가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았다. 여느 평범한 강이었다. 여름철에는 수영이나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다고 들었는데 벌써 가을 초입이어서인지 보트 몇 대가 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조용한 강을 그냥 한참 봤다. 눈에 담고 싶은 풍경이어서이기보다 그 고요가 좋아서였다. 동행에게 미안함은 여전했지만 마음은 한결 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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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인연이구나 하는 경우가 있다. 훈데르트바서Hundertwasser를 만난 것이 나에게는 그런 경우였다. 여러 해 전 우연히, 지금은 어떤 경로로 티켓이 내 손에 들어왔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우연히, 훈데르트바서의 전시회를 관람했다. 그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갔던 그 곳에서 푸른 잔디로 지붕을 덮은 건축 모형 작품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훈데르트바서는 건축물을 세움으로써 자연의 일부를 빌려 쓰는 만큼 그 공간을 다시 자연에게 돌려 주기 위해 옥상 정원을 계획했다. 그래서 그가 디자인한 대부분의 건축물 옥상들은 정원으로 꾸며져 있다. 옥상 정원의 초록색이 더 강렬하게 느껴진 이유는 그것이 마치 파도처럼 넘실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연주의 건축가는 가우디Antoni Gaudi밖에 몰랐던 내가 훈데르트바서라는 이름을 새긴 순간이었다. 그리고 한두 해가 지났을 것이다. 병원이었는지, 미용실이었는지, 그 어딘가의 대기실에서, 그러하니 이도 우연이라고 할 수밖에, 시간을 때우느라 뒤적인 잡지에서 짧은 여행상품 광고를 보았다. 오스트리아 빈의 관광지 목록 끝에 적힌 작은 글씨, ‘훈데르트바서하우스Hundertwasserhaus’. 잠깐 생각했던 듯 하다. ‘언젠가 한 번 빈에 가야겠다.’ 여행이 절반을 넘어 후반을 향하는 시점에 꺼내긴 늦은 감이 있지만, 그렇다. 내가 빈을 선택한 이유다.

 

내리자마자 알록달록한 건물을 마주할 줄 알았는데 트램이 내려 준 곳은 평범한 주택가이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주변을 살피니 나처럼 훈데르트바서를 찾은 이들을 위해 그가 개조한 두 곳이 표시된 친절한 안내판이 보인다. 훈데르트바서하우스를 먼저 가려고 했는데 쿤스트하우스Kunsthaus Wien가 바로 근처인 것 같아 순서를 바꿨다. 둘 간 걸어서 5분 거리이니 어디를 먼저 가든 큰 상관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매우 다행스런 선택이었다. 훈데르트바서하우스는 실제 거주자가 있는 아파트라 개방이 되지 않지만 쿤스트하우스는 1991년 개관한 훈데르트바서 박물관으로 구경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만약 이를 감안하지 못한 채 먼저 훈데르트바서하우스에서 너무 오래 시간을 보냈다면 쿤스트하우스는 충분히 보지 못할 뻔 했다.

 

훈데르트바서는 그가 21세 때 개명한 이름인데 이라는 단어를 합친 것이고 그의 많은 작품에서 百水라는 낙관도 자주 볼 수 있다. 이름에서도 짐작되듯이 그는 로 상징되는 자연을 사랑했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것을 표현했다. 쿤스트하우스는 그런 그를 정말 꽉 차게 담고 있었다. 그는 신은 직선을 만들지 않았다.’는 말을 했는데 정말 건물 어디에도 직선이 없었다. 올록볼록한 벽이나 원형으로 된 기둥들은 그렇다 치고 바닥까지 평평하지 않은 게 정말 놀라웠다. 어린이 단체 관람객이 한 쪽에 모여 앉아 색종이로 훈데르트바서의 건물 모형을 만들고 있었는데, 굴곡진 바닥 때문에 엉덩이를 실룩거리는 모양이 예뻤다. 건물이 큰 편은 아닌데 그가 디자인한 우표, 자동차 번호판 등을 포함해 전시된 작품 수는 매우 많았다. 과거 전시회에서 내가 봤던 작품들이 아마도 이 곳에서 옮겨진 듯 한데 그 때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면 지금은 내 시선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앞서 봤던 세기말 빈의 그림들도 즐겁게 봤지만 나는 아무래도 여기, 쿤스트하우스의 훈데르트바서 그림들이 더 마음에 든다. 선과 면이 단순하고 원색이 많아 아이들이 그린 그림 같은 밝은 정서가 좋다. 계속 두고 보고 싶어 기념품 가게에 들렀는데 적당한 도록이 없어 아쉬운 대로 엽서만 몇 장 구입했다.[각주:1]

 

훈데르트바서하우스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걷는데 아기자기한 그림 타일로 장식된 건물이 눈에 띈다. 벽을 따라 모퉁이를 도니 드디어 오색찬란한 골목이 나타났다. 훈데르트바서빌리지Hundertwasser Village라고 이름 붙은 그 곳엔 아파트, 카페, 작은 분수가 있는 놀이공간, 그리고 아파트 맞은편으로 식당과 기념품 가게 등이 있는 상가가 있다. 쿤스트하우스에서부터 계속 보고 있음에도 질리지 않는 둥근 기둥과 천연색 타일에 눈길 한 번 주고 곡면의 특성을 이용해 공간을 나누고 이은 방식에 두 번째 놀란다. 마지막까지 시선을 잡아 두는 것은 역시 아파트, ‘훈데르트바서하우스. 구획을 나눠 색을 입힌 것이 퀼트가 연상됐다. 그런데 그 구획이 똑떨어지는 것도 아닌데다 그 안의 창문도 모두 제각각이어서 도무지 아파트라는 것을 믿기 어려웠다. 게다가 옥상과 테라스에는 나무가 울창해서 파란 하늘과 초록의 나무, 빨갛고 노란 벽이 오묘하게 조화를 이뤄 그간 본 적 없는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이렇게 이색적인 곳이니 매일 관광객들로 북적일 것이다. 이곳 주민들이 부럽지만은 않은데 그래도 이런 상상에는 미소가 지어진다. “네 집 창문은 무슨 색이야?”, 아이들은 서로를 노란 창문 집 아이’, ‘파란 창문 집 아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오늘은 초록이네서 모이자!”.

 

  1. 여행을 다녀오고 반 년쯤 후 서울에서 훈데르트바서의 전시회가 이전보다 더 큰 규모로 열렸다. 이 때도 정말 우연히 소식을 접해서 놓치지 않고 관람했는데 그 곳에서 마음에 드는 도록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물론 한국어로 되어 있어서 나에게는 더 안성맞춤이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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