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인연이구나 하는 경우가 있다. 훈데르트바서Hundertwasser를 만난 것이 나에게는 그런 경우였다. 여러 해 전 우연히, 지금은 어떤 경로로 티켓이 내 손에 들어왔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우연히, 훈데르트바서의 전시회를 관람했다. 그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갔던 그 곳에서 푸른 잔디로 지붕을 덮은 건축 모형 작품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훈데르트바서는 건축물을 세움으로써 자연의 일부를 빌려 쓰는 만큼 그 공간을 다시 자연에게 돌려 주기 위해 옥상 정원을 계획했다. 그래서 그가 디자인한 대부분의 건축물 옥상들은 정원으로 꾸며져 있다. 옥상 정원의 초록색이 더 강렬하게 느껴진 이유는 그것이 마치 파도처럼 넘실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연주의 건축가는 가우디Antoni Gaudi밖에 몰랐던 내가 훈데르트바서라는 이름을 새긴 순간이었다. 그리고 한두 해가 지났을 것이다. 병원이었는지, 미용실이었는지, 그 어딘가의 대기실에서, 그러하니 이도 우연이라고 할 수밖에, 시간을 때우느라 뒤적인 잡지에서 짧은 여행상품 광고를 보았다. 오스트리아 빈의 관광지 목록 끝에 적힌 작은 글씨, ‘훈데르트바서하우스Hundertwasserhaus’. 잠깐 생각했던 듯 하다. ‘언젠가 한 번 빈에 가야겠다.’ 여행이 절반을 넘어 후반을 향하는 시점에 꺼내긴 늦은 감이 있지만, 그렇다. 내가 빈을 선택한 이유다.

 

내리자마자 알록달록한 건물을 마주할 줄 알았는데 트램이 내려 준 곳은 평범한 주택가이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주변을 살피니 나처럼 훈데르트바서를 찾은 이들을 위해 그가 개조한 두 곳이 표시된 친절한 안내판이 보인다. 훈데르트바서하우스를 먼저 가려고 했는데 쿤스트하우스Kunsthaus Wien가 바로 근처인 것 같아 순서를 바꿨다. 둘 간 걸어서 5분 거리이니 어디를 먼저 가든 큰 상관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매우 다행스런 선택이었다. 훈데르트바서하우스는 실제 거주자가 있는 아파트라 개방이 되지 않지만 쿤스트하우스는 1991년 개관한 훈데르트바서 박물관으로 구경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만약 이를 감안하지 못한 채 먼저 훈데르트바서하우스에서 너무 오래 시간을 보냈다면 쿤스트하우스는 충분히 보지 못할 뻔 했다.

 

훈데르트바서는 그가 21세 때 개명한 이름인데 이라는 단어를 합친 것이고 그의 많은 작품에서 百水라는 낙관도 자주 볼 수 있다. 이름에서도 짐작되듯이 그는 로 상징되는 자연을 사랑했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것을 표현했다. 쿤스트하우스는 그런 그를 정말 꽉 차게 담고 있었다. 그는 신은 직선을 만들지 않았다.’는 말을 했는데 정말 건물 어디에도 직선이 없었다. 올록볼록한 벽이나 원형으로 된 기둥들은 그렇다 치고 바닥까지 평평하지 않은 게 정말 놀라웠다. 어린이 단체 관람객이 한 쪽에 모여 앉아 색종이로 훈데르트바서의 건물 모형을 만들고 있었는데, 굴곡진 바닥 때문에 엉덩이를 실룩거리는 모양이 예뻤다. 건물이 큰 편은 아닌데 그가 디자인한 우표, 자동차 번호판 등을 포함해 전시된 작품 수는 매우 많았다. 과거 전시회에서 내가 봤던 작품들이 아마도 이 곳에서 옮겨진 듯 한데 그 때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면 지금은 내 시선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앞서 봤던 세기말 빈의 그림들도 즐겁게 봤지만 나는 아무래도 여기, 쿤스트하우스의 훈데르트바서 그림들이 더 마음에 든다. 선과 면이 단순하고 원색이 많아 아이들이 그린 그림 같은 밝은 정서가 좋다. 계속 두고 보고 싶어 기념품 가게에 들렀는데 적당한 도록이 없어 아쉬운 대로 엽서만 몇 장 구입했다.[각주:1]

 

훈데르트바서하우스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걷는데 아기자기한 그림 타일로 장식된 건물이 눈에 띈다. 벽을 따라 모퉁이를 도니 드디어 오색찬란한 골목이 나타났다. 훈데르트바서빌리지Hundertwasser Village라고 이름 붙은 그 곳엔 아파트, 카페, 작은 분수가 있는 놀이공간, 그리고 아파트 맞은편으로 식당과 기념품 가게 등이 있는 상가가 있다. 쿤스트하우스에서부터 계속 보고 있음에도 질리지 않는 둥근 기둥과 천연색 타일에 눈길 한 번 주고 곡면의 특성을 이용해 공간을 나누고 이은 방식에 두 번째 놀란다. 마지막까지 시선을 잡아 두는 것은 역시 아파트, ‘훈데르트바서하우스. 구획을 나눠 색을 입힌 것이 퀼트가 연상됐다. 그런데 그 구획이 똑떨어지는 것도 아닌데다 그 안의 창문도 모두 제각각이어서 도무지 아파트라는 것을 믿기 어려웠다. 게다가 옥상과 테라스에는 나무가 울창해서 파란 하늘과 초록의 나무, 빨갛고 노란 벽이 오묘하게 조화를 이뤄 그간 본 적 없는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이렇게 이색적인 곳이니 매일 관광객들로 북적일 것이다. 이곳 주민들이 부럽지만은 않은데 그래도 이런 상상에는 미소가 지어진다. “네 집 창문은 무슨 색이야?”, 아이들은 서로를 노란 창문 집 아이’, ‘파란 창문 집 아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오늘은 초록이네서 모이자!”.

 

  1. 여행을 다녀오고 반 년쯤 후 서울에서 훈데르트바서의 전시회가 이전보다 더 큰 규모로 열렸다. 이 때도 정말 우연히 소식을 접해서 놓치지 않고 관람했는데 그 곳에서 마음에 드는 도록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물론 한국어로 되어 있어서 나에게는 더 안성맞춤이었다. [본문으로]
Posted by nobeln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