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단과 관객의 평도 좋고, 스스로도 보고 싶다 함에도 연이 안 닿는 작품들이 있다. 여유가 없어 때를 놓치거나 작품을 선택하는 순위에서 어쩌다 보니 밀리거나, 이런 저런 다양한 이유로......
'바람의 나라'의 경우, 초연이 2006년이고 이듬해 앵콜 공연도 했었는데도 이제사 연이 닿았다. 벼르고 있었던 건 아니었는데, 이번엔 운이 좋게 시기가 맞았다.
요즘은 어떠한지 잘 모르겠지만, 90년대 초중반, 내가 중고등학교 다니던 시절, 월간순정만화잡지는 꽤 붐이었고, 그 시작점에 아마 '댕기'가 있었을 것이다. 유일하게 내가 꽤 열심히 이런 저런 수단으로 매달 챙겨 봤던, 내 돈 주고 사기도 몇 번, 언니가 했던 댕기계에 빌붙기도 여러 번, 잡지였다. 연재되던 만화들 중 유명한 작품은 한 둘이 아니다. '불의 검', '풀하우스', 그리고 김진의 대서사시 '바람의 나라'도 있다. 이미 드라마로까지 만들어진 유명한 작품을 두고 원작에 대해 아는 체를 하려는 게 아니다. 뮤지컬 '바람의 나라'는 '원작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다.'를 넘어서 원작에 대한 이해와 경외심을 드러낸 듯 하였기에 짚고 넘어감이다. 참고로 뮤지컬 '바람의 나라' staff list는 이렇게 시작한다. '원작.1차 각색: 김진 / 연출. 2차 각색: 이지나', 김진과 이지나는 어마어마한 대서사시를 두어시간의 무대로 옮기는 과정에서 서로 정말 많이 이야기했을 거라 짐작된다. 서로를 존중하면서.
뮤지컬 '바람의 나라'는 그 표현방식에서 여타 다른 뮤지컬과는 사뭇 다르다. 대사와 가사가 있는 노래가 많지 않다. 그러나 눈과 귀는 바쁘다. 무대 뒷편에서 보여지는 대서사시의 이해를 돕는 영상을 쫓아가야 하고, 무대 이편 저편에서의 몸짓들을 하나라도 놓칠까 불안해지기까지 한다. 영상은 단순히 설명 문구를 보여주기 위해서만 쓰인 것이 아니다. 김진의 만화컷을 이용하여 주인공 무휼의 등장을 돕는 것을 시작으로 죽음을 앞둔 해명의 마지막을 묘사한 씬에서의 저승새 이미지 또한 인상적이었다. 뮤지컬이라기보다 이미지극, 무용극이라는 평을 받고 있듯 음악과 영상을 배경으로 두고 무대위에서의 몸짓들은 과연 양대 뮤지컬계 시상식에서 모두 안무상을 거머쥘 만 한 것이었다. 특히 고구려와 부여의 긴 전쟁신에서의 안무는 정말 놀라웠다. 그저 화려한 쇼에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탭을 이용한 질주하는 말들의 표현과 바람 속에서의 칼놀림, 움직임 하나하나가 정말 너무 세련되게 멋있었다. 가사가 있는 노래가 많지 않지만 국악과 양악의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자연스럽게 사용되었다. 역사적 사실을 다룬 대서사시에 무려 랩도 나온다. 신기하게도 어색하지 않다. 많지 않은 노래지만 죽음을 앞둔 해명이 자신의 운명을 두고 부르는 노래나, 무휼과 호동의 엇갈리는 길에 대한 노래는 취하게 할 만한 것이었다. 이건 가창력이 좋은 양준모의 역량 덕분이기도 싶다. 뮤지컬 '바람의 나라'에서 또 하나 인상에 남는 것은 의상인데, 화려한 듯 하면서도 절제된 미가 보인 주요 인물들의 의상도 물론이지만 앙상블들의 의상들이 난 더 기억에 남는다. 그것들은 그들이 표현하는 몸짓에 보탬이 되는 것들이었다. 초반 괴유의 등장에서 나왔던 마이크사고와 호동의 눈에 너무 띄었던 대사 실수가 아주 잠깐 거슬리긴 하였으나 공연장을 나섰을 때 예술의 전당 야외 음악분수가 더 아름답게 보이고 들린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사족 하나만 더, 괴유 역의 김산호는 이 역할로 꽤 많은 팬들을 얻었을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