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린에 머무는 중 온전한 하루가 주어진 유일한 날, 여유를 핑계 삼아 호스Howth에 갔다. 가볍게 걷기 좋은 작은 항구 마을이라고 지인이 추천했던 곳이다. 시내에서 출발한 버스가 교외로 향하면서 보여주는 창 밖 풍경의 흐름은 정화다. 돈 냄새가 가득해 정신 못 차리다 나도 모르는 새 산소 흡입을 하고 있다. 한결 야트막해진 집들과 넓지 않지만 한적해서 오히려 갑갑하지 않은 길은 상투적이지만 정말 평화롭다. 호스가 종착지인 버스이나 정말 종점까지 가야 하는지 어쩔지 몰라 눈치를 살피는 중이었다. 마을 깊숙한 데까지 왔다 싶어 내렸는데, 내 뒤로 내리려는 외국 소녀 셋을 기사가 불러 세웠다. 아마도 산책로에 대한 팁을 주는 듯 했다. 내리려다 말아 버린 그녀들을 쫓아 나도 후다닥 다시 올라 탔다. 기사는 한 두 정거장을 더 간 후에 우리를 내려 주면서 왼편 언덕을 가리켰는데, 언덕 끝은 바다가 바로 옆에 닿아 있는 산책로의 초입이었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데 바닷바람이 무시할 게 못되어 우산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바다를 배경으로 셀카를 찍겠다고 폼을 잡는데 날씨가 이도 영 도와주지를 않았다. 걸으라는 길이고 걷자고 왔으니 사진도 날씨도 개의치 말자 다짐했다. 우산을 접고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점퍼 모자를 뒤집어쓰고 걸음을 내디디었다. 그러니 눈이 열심히 풍경을 담는다. 바다뿐 아니라 반대편의 꽃밭도 보인다. 두어 사람만 나란할 수 있는 길을 사이에 두고 푸른 바다와 노란 꽃밭이라니, 흔하게 보던 해안 경치가 아니어서 적잖이 감동이었다. 흙을 밟고 바다 내음을 맡고 들꽃을 본다. 흐뭇하다. 얼굴을 때리는 비도 싫지 않으니 마음이 즐거운 것이 분명하다. 쭉 이런 길이여도 나쁘지 않은데, 어느 지점에선가 끝이 나고 자연스럽게 마을로 들어서게 되어 있다. 마을은 버스에서 지나치며 흘깃댔을 때도 아기자기하다 느꼈는데 천천히 살피니 더 오밀조밀하다. 규칙적으로 세워진 듯 하면서도 외벽 색을 달리한 집들이 조화롭다. 창에 화분을 두어 장식한 것은 새롭지 않았는데, 외벽 넓은 공간에 모형 곤충을 한 마리 부착한 집이 여럿 있어 특이했다. 모형을 두면 진짜 곤충은 집에 끼지 않는다거나 하는 미신은 아닐까 생각했는데 확인하진 못했다. 다만 그 모양이 너무 예뻐서 열심히 카메라 줌을 당겼다.

 

선착장이 보이는 큰길까지 왔을 때 우연히 한 이정표를 봤다. ‘빈티지 라디오 박물관Vintage Radio Museum이라고 쓰였다. 나는 외국어 울렁증도 있으면서 외국 여행 중 고서점을 만나면 일단 들어간다. 오래된 것에 반응한단 얘기다. 그런데 이정표가 가리킨 방향으로는 딱히 길이 보이지 않아 우선 관광 안내소를 찾아 물었더니 친절히 위치를 표시해서 지도를 건네주었다. 집과 집 사이, 무심히 지나치면 놓치고 말았을 곳에 골목이 있었다. 쭉 따라가니 그 끝에 덩그러니 원형 탑이 하나 있다. 1805년 나폴레옹Napoleon의 침략을 막기 위해 항구가 보이는 곳에 세운 마텔로타워Martello Tower인데, 현재는 라디오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입구와 연결된 사다리를 오르는데, 탑 옆에 주차되어 있던 승용차에서 연세가 있어 뵈는 아저씨가 내리더니 나를 따라 온다. 관리인이라고 해서 성급히 입장료를 꺼내려는데 돈은 받지 않고 그저 나를 안으로 이끌었다. 문이 열렸다. “우와!” 입 밖으로 감탄사가 튀어 나왔다. ‘박물관이란 단어는 아무래도 격식을 갖춘 전시의 인상을 담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곳은 박물관이라기보다 보물창고에 가깝다. 밖에서 보기에 탑은 그리 크지 않아서 볼거리가 얼마 될까 했는데, 두 층으로 된 내부는 한 사람만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통로만 제외하고 바닥부터 천장까지 수많은 종류의 통신 기기들로 빼곡히 채워졌다. 어디에 눈을 둬야 할 지 모르게 양은 어마어마했고 유리관 안에 조명까지 장착되어 진열된 여느 박물관의 어떤 물건보다도 흥미로웠다. 관리인 아저씨는 중간중간 기기의 역사, 의미, 등을 설명해 주는 것은 물론, 어떤 기기는 직접 작동해 보였다. 과연 소리가 날까 싶을 만큼 낡은 것들은 오히려 내가 직접 시동하게 해 의심을 잠재웠다.

혹시 당신이 직접 모은 것인가요?”

누군가의 다락방을 훔쳐보듯 재미있는 구경을 마쳤을 때 그에게 물었다. 이 멋진 보물의 주인은 팻 허버트Pat Herbert라는 수집가라고 한다. 그의 직업은 건설 감독이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지역 라디오 방송에 매료되어 라디오를 모았고 지금도 여전히 수집 중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덧붙이시기를

그는 미쳤어! He is crazy!

아저씨의 농담에 함께 웃으면서 생각했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쳐야 미친다. 분명히 5유로라고 표시되어 있었는데 관리인은 끝까지 입장료를 받지 않았다. 팻은 라디오에 미쳤지, 돈에는 관심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관리인 직무유기가 걱정되었으나 실랑이를 계속할 수 없어 방명록에 감사의 흔적을 남기는 것으로 대신하고 나왔다.

Posted by nobeln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