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듣고 느낌2010. 11. 15. 22:28
10주년 기념으로 무대에 오른 뮤지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보았다. 10주년이라는 수식어가 말하듯 이 작품은 잘 알려진 괴테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10년 전 처음 무대에 오른 대한민국 순수 창작이다. 원작 소설을 떠올려 볼 때, 뮤지컬이라는 장르와는 영 어울리지 않을 듯 한, 혹 어떻게 잘 요리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뻔한 멜로 드라마. 그래서 지난 10년동안 아마도 나는 무심했었나보다. 동갑내기 잡지 <더뮤지컬>이 10주년을 맞아 매달 한국 뮤지컬 지난 10년을 대표하는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세 번째 주인공이 아니었다면, 나는 여전히 무심했을 터였다.

예매를 할 당시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사사로운 일정들 탓에 공연장으로 가는 내 발걸음은 꽤나 피곤했다. 그래서 살짝 걱정을 했다. '졸면 어쩌지?'. 예전같지 않은 체력인데다 아무래도 원작이 서간체 소설이지 않은가..... 그런데 작품은 원작에 참 충실하였으나 신기하게도 지루하지 않았다.

끝이 좋아야 다 좋은 것도 그러하지만, 시작의 중요성도 그에 못지 않다. 이 작품은 강렬했던 레드의 끝 장면 역시 지울 수 없는 인상이었으나, 나는 정말 편지를 읽기 시작한 기분이 들었던 첫 장면이 참 인상깊었다. 다양한 형태의 의자들이 나란히 놓여 있던 무대. 그리고 등장인물들이 한 사람씩 나와서 자리를 채웠다. 그리고 편지를 쓰는 듯한 부드러운 몸짓. 이런 색다른 도입부, 연출가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배우들은 어떤 마음으로 저 동작들을 하고 있을까? 나 외에 다른 관객들은 무엇을 느낄까?. (<더뮤지컬> 11월호에 김민정 연출가는 이 오버추어 장면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공연은 막이 열리면 인물로 들어가야 하는데 최전선에 인물이 아닌 배우를 세우는 것이 우리의 출발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어요. - 중략 - 표현하려고 했던 것은 사랑이죠. 베르테르의 주제어였어요") 여러가지 생각들로 극에 대한 호기심이 자극됐고, 아직은 내공이 많이 부족한 터라 답을 내지 못해 살짝 괴로워질 때 쯤 본격적으로 극이 시작됐다. 아무래도 무대이다 보니 많이 압축된 탓이겠으나 베르테르와 롯데가 사랑하게 되는 과정의 개연성이 부족해서 잠깐은 베르테르의 사랑이 억지같기도 했다. 더더욱 롯데의 감정선은 내 감성으로는 이해에 부쳤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를 넘어 슬픈 감성을 전하는 장면들이 놀라웠다. 인물들 각자가 서 있는 곳을 적절히 구분시켜 주는 무대의 사용이 참 좋았다. 그리고 베르테르와 롯데가 데이트? 산책하는 그 언덕, 베르테르가 떠나는 배이기도 하고 알베르트가 도착하는 배이기도 하다. 게다가 베르테르와 롯데가 격정적인 키스를 하는 장면에서 알베르트는 무려 그 2층에 묵묵히 걸터 앉아 있다. 그리고 베르테르가 자신에게 총을 겨누는 마지막 레드 역시 그 공간에서 이뤄진다. 그 공간이 정말 얼마나 매력적이던지.(나는 언젠가부터 뮤지컬을 볼 때 무대를 뜯어보기 시작했다;;;) 배우들의 연기는 좀 다르다고 느꼈다. 잘한다 못한다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정적이었는데, 그게 오히려 극 속에 깊이 들어가 있는 듯 해서 이것 또한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래도 노래에 대한 감상은 빼지 않는다면 알베르트 민영기는 괜히 성악 전공자가 아니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깨달음 정도.

음악을 포함해서 전체적으로 정적이었는데 지루하지 않고, 그 슬픔이, 그 사랑이 전해지더라는 게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가 아닐까? 그러니깐 머리로 생각하면 찌질하기 짝이 없건만, 공연을 보고 나오면서 나는 이런 고백을 하고 말았단 말이다.

사랑은, 그러니깐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뱀다리. 이전에 뮤지컬 갈라쇼에서 한 두번 듣고 좋아했던 '하룻밤이 천년'이 이렇게나 슬픈 곡인 줄 몰랐다. 그동안 무심했던 게 미안해졌다.
Posted by nobeln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