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듣고 느낌2012. 4. 21. 23:45

작년 여름, 한참 터키 여행을 준비하던 때에 두산아트센터 Space111 에서 초연한 뮤지컬 '모비딕'을 보고 와서 '소리와 음악의 감동'이라는 짧은 감상을 남겼더랬다. 그리고 채 1년이 되지 않은 올 봄, 뮤지컬 '모비딕'은 같은 곳의 연강홀로 무대를 좀더 넓혀 다시 배를 띄웠다. 이렇게나 가슴 뛰는 작품이 되어.

뮤지컬 '모비딕'은 설명이 좀 필요하다. 외국에서는 그 사례가 있었다고 하나,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시도된 액터-뮤지션 뮤지컬이므로. '액터-뮤지션'은 말 그대로 연기자와 음악인을 겸하는 아티스트를 말한다. 그렇다고 노래 부르는 아이돌이 나오는 뮤지컬을 '액터-뮤지션 뮤지컬'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액터-뮤지션 뮤지컬'이란 작품 안에서 '액터-뮤지션'이 구현되는 것이다. 즉 연기자가 극 안에서 직접 악기를 연주한다. 외국의 사례는 몇 번 글로 소개받았었으나 사실 상상이 잘 되지 않았었다. 뮤지컬 '모비딕'은 나의 첫 액터-뮤지션 뮤지컬이었고, 뮤지션이 연기를 하기 위해, 연기자가 음악을 만들어 내기 위해, 멜로디가 쪼개지고, 또 겹쳐지는 너무나 신선한 편곡의 묘미와 소리의 향연을 내게 선사했다. '소리와 음악의 감동', 한 구절로 표현된 초연 때의 내 감상이다.

뮤지컬 '모비딕'은 조용신 작, 연출가와 정예경 작곡가를 필두로 한 창작진이 '우리 새로운 거 한 번 해보자' 해서 1년여동안 워크숍부터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올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액터-뮤지션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고집하기 위해서는 연주와 극 연기에서 아무렴 연주에 비중이 더 실렸을테고, 단계를 밟아 수정 보완해 왔다 하더라도 작품의 드라마까지 욕심내기엔 1년은 아무래도 부족했을 터였다. 초연의 아쉬움은 여기에서 나왔다. 사소한 효과음까지도연기자가 악기를 통해 직접 소리를 만들어내며, 화려한 기교의 연주는 그 자체로 연기가 되었지만, '모비딕'의 작품 철학을 이해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올해 다시 만난 무대는 줄거리가 있는 콘서트같단 느낌이 없지 않았던 초연의 한계를 극복하고, '모비딕'의 원작소설을 모른다 할 지라도 충분히 극을 이해할 수 있게 유기적인 흐름을 만들어냈다. '인간과 자연과 교감'이라는 이 작품의 주제 의식에 가장 가까운 인물인 퀴케그의 캐릭터가 분명해 진 것이 대표적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초연 때 배우가 흰색 자켓을 덧 입는 것이나, 지금 무대 앞쪽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나, 콘트라 베이스가 흰 고래 모비딕을 형상화하는 것은 여전히 모호하다.

극의 이해를 돕는 것에 무대 또한 한 몫 했다. 공연을 보기 전 새로운 '모비딕' 무대에 대한 기사를 접해서 대략의 스케치까지 봤었음에도, 공연장에 들어섰을 때 무대는 나로 탄성을 자아냈다. 바다에 침몰해 버린 난파선. 불안하고 위태롭고 위압적인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 택했다는 경사무대는 실제 배우들이 움직일 때마다 아슬아슬한 항해를, 모비딕과의 죽음을 건 사투를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게 했다. 피아노의 위치가 초연 때 중앙에서 이번 공연에서 바깥쪽으로 옮겨진 것도 더 나아진 방향같다. 피아노를 담당하는 이스마엘에게 관찰자라는 정체성을 더 분명하게 부여했으므로.

악기를 연주할 줄 알면서 캐릭터에 부합하는 연기자를 찾는 것부터 쉬운 일은 아니었을터, (프로그램을 보니 같은 배역을 연기하지만 사용하는 악기가 다른 더블 캐스팅도 있는데다, 같은 악기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뮤지션이 해오던 연주 방식이 달라 악보도 모두 달랐다고 한다.) 어렵게 모은 뮤지션들에게 노래와 연기를 주문해 뮤지컬 무대에 세우는 것이 어디 만만한 일이었겠는가. 당연히 그들의 연기는 베테랑 배우들에 훨씬 미치지 못하나, 그래도 박수를 보낼 수 밖에 없는 건 초연 대비 일취월장한 연기를 보여주기까지의 그들의 노력과, 그들은 다른 배우들이 하지 못하는 연주의 연기를 보여주기 때문. 이스마엘 신지호, 당신의 피아노는 정말 최고! 퀴케그의 지현준은 연기자 출신이라 그런지 비교적 안정된 연기를 보여주나, 역시 KoN이 들려주는 소름끼치는 바이올린 퍼포먼스가 그리웠다. KoN 캐스팅으로 봤다면, 여전히 퀴케그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없었을까? 그럴지도.-_-. 광기어린 중심인물 에이헙의 황건은 이 작품으로 인기가 치솟는듯 하니 더 말하지 않지요.

마지막으로 내가 최고로 반했던 연출을 꼽는다면, 도입부분 망자들의 등장 장면. 조명의 어우러짐은 정말 최고였답니다.

Posted by nobeln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