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어는 오후 3시에 끝났다. 돌아가는 페리 탑승 시간은 5, 시간이 남는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하며 관광안내지도를 살펴봤다. 한 곳이 눈에 뜨였다. ‘블랙포트The Black Fort’, ‘검은 요새라는 지명이 맘에 들었다. 근처 기념품 가게에서 거리를 물었더니 도보로 편도 40여분, 빠듯할 듯 하지만 달리 할 일도 없고 너무 늦어지면 중도에 되돌아오지 싶어 걸음을 나섰다. 사람이 다니는 길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인적이 없었다. 그나마 아무렇게나 쪼개어 만든 것처럼 보였어도 방향 표지판이 간간이 있어 안심이 되었다. 외로운 걸음이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무엇인지 모른 채였고 어쩌면 확인하지 못하고 뒤돌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래서 걷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머리가 복잡할 때 아무 생각 없이 운동을 한 차례 하는 것이 도움이 되듯, ‘지금 내가 걷는다가 좋았다. 슬슬 돌아설 타이밍이 신경 쓰이려는데 반대편에서 사람이 나타났다. 안 그래도 물어볼 참인데 얼마 남지 않았다고, 조금만 더 가면 닿을 수 있다고 먼저 말을 건네 왔다. 5분쯤, 정말 조금 더 힘을 내어 마지막 돌계단을 올랐을 때, 내게 보여지는 장면에 나는 진심으로 감격했다. 앞에는 망망한 바다가, 뒤로는 광활한 평원이 같은 눈높이에 담기는 평평한 돌밭이 펼쳐져 있었다. 바다 쪽으로 가까이 가니 해안절벽은 아주 높지 않지만 땅끝 생김새는 요새다운 위세가 충분했다. 지대가 꽤 넓어 인위로 방어벽 한둘 세웠을 수도 있는데 그런 흔적은 전혀 아무 것도 없었다. 사방으로 이렇게 단 하나의 걸림도 없이 트인 풍경을 만나는 일이 흔할까. 그리고 그 곳에는 나를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된 듯 했고 보이는 모든 것이 다 내 것 같았다. 둔앵거스에서 실망한 후 모허 절벽을 택했어야 했나 후회가 들었는데, 블랙포트에서 모든 후회는 저 멀리 날아갔다. 만약 모허 절벽을 갔다면, 아마 거기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위치에서 똑같은 것을 보고 똑같이 감동했겠지만, 나 혼자만의 지금, 여기를 갖진 못했을 것이다.

 

저녁 식사는 키르완 레인Kirwan’s Lane에서 했다. 호텔 프런트에서 추천해 준 식당 중 가장 번잡하지 않아 보여 선택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분위기가 꽤 고급스럽다. 가장 먼저 내민 메뉴판은 와인 리스트, 생각지 않았었지만 본 김에 기분내지 싶어 레드 와인 한잔을 먼저 주문하고 식사는 종업원이 권하는 것을 따랐다. 메인은 그날의 스페셜 요리로 가자미 구이였는데 살이 정말 부드러웠다. 조금 짠 듯 했지만 사이드로 나온 감자가 중화시켜 주었다. 정말 맛있었던 것은 전채 요리로 나온 홍합찜이었다. 작은 냄비를 홍합으로 가득 채우고 자작하게 끓였는데 바닷바람을 실컷 맞은 후라 그랬는지 뜨끈한 바다의 맛이 일품이었다. 전식으로 스프와 빵까지 제공되어 양이 적지 않았는데 섬에서 점심이 부실해서 허기져 있었기에 어느 하나 남기지도 않고 다 먹었다. 제대로 갖춰 풀코스를 먹은 셈이라 한국 돈으로 7만원 정도 나왔지만 너무 만족스러워서 전혀 아깝지도 않았다. 예산을 훌쩍 넘겼으나, 이 만찬은 오늘, 91, 입사 7주년 기념이라 하겠다. 이 정도의 호사는 충분히 누려도 될 만큼 그간 애쓴 스스로를 위로하고 축하한 저녁이 되었다.

Posted by nobeln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