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을 걷다/Wien, Austria_2016

[Wien, Austria_2016] #01. 프롤로그

nobelnant 2017. 11. 8. 20:59

또 여행을 간다. ‘가 풍기는 것은 반복이 주는 지루함 같은 것인데 여행과 만나면 그렇지가 않다. 장소가 바뀌고 때가 다르며 여행자도 전과는 완전히 같지 않을 것이다. 이제부터 쓰려는 것은, 몇 번의 여행 중 특별히 2016년 이른 가을 내가 오스트리아Austria의 수도, Wien을 여행한 이야기이다.

 

처음 혼자 배낭여행을 했던 기억과 비교하면 나의 여행 패턴은 꽤 달라졌다. 계획이 줄고 여행지에 나를 그냥 던져두게 되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상황이 그랬다. 야근이 일상화되어 있는 직장인인 탓에 계획을 세울 여력이 없었다. 다음은 경험적인 이유다. 여전히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여행 경력이 쌓이면서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이 줄었다. 오지가 아닌 한 정보는 널렸고, 한국에서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짧은 기간 머무는데 필수품일 리 없으며, 국제 미아가 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마지막은 내 의지다. 모름지기 계획이라 함은 앞으로의 일을 미리 헤아려 정함이다. 여행을 가기 전에 짜 놓은 계획이 감동까지 미리 정하는 것은 아닐까. 계획 덕에 빈틈 없는 여행일 순 있겠지만 어느 빈틈은 나에게 감동의 순간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그래서 일부러 계획을 덜 하려고 한다.

 

이번 여행도 비슷했다. 일요일 오전 출발인데 토요일 오후까지 회사에 붙잡혀 있었고 손에 쥔 것이라곤 항공권, 호텔예약번호, 햘슈타트Hallstatt 왕복기차표 정도가 전부였다. 그럼에도 전날까지 너무 부산해서였는지 걱정도 되지 않았다. 주일 예배를 드린 후 엄마의 배웅을 받으며 공항버스에 오르고 나서야 여행이 실감됐다. 긴장감과 설렘이 섞인 묘한 감정이다. 여행이 시작되었다.

 

인천 국제공항에서 동행을 만났다. 

 "함께 여행을 떠날 이는 진지하지 않고, 심각하지 않고, 질척거리지 않고, 부담스럽지 않고, 예민하지 않고, so cool하면서도 유쾌하고, 따뜻하고, 배려심 많고, 그렇지만 이런 성격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잡지 [페이퍼Paper]에서 본 누군가의 여행지기론인데 격하게 공감한다. 나의 동행은 처음 만난 지 곧 20년이 되는 오랜 친구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우정을 이어올 수 있었던 건 둘이 너무 닮았거나 또는 너무 달라서가 아니라, 어딘가는 비슷하고 어딘가는 다른데 서로 그냥 그렇구나.’ 해서였다고 생각한다. 함께 여행은 처음이었다. 그녀가 저 여행지기론에 부합한 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저런 여행지기일 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만 어떤 상황에서도, 설사 다툼이 생겨 중도에 서로 헤어지게 될 지라도, 그 결론은 그냥 그렇구나.’일 것이라는 믿음은 있었다. 마침 목적지가 맞았을 뿐, 함께 가게 된 것이 우리 둘이 꼭 같이 여행가자도 아니었으니, 그 믿음이면 충분했다. 장치는 하나 두었다. 호텔은 각자 방을 따로 잡았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여행가서는 꼭 싸운다.’라는 명제가 너무 두려운 이들에게는 작은 팁이 될 수도 있겠다. 혼자인 내 방에서는 질척거려도 되고, 예민해도 되고, 게다가 그 모든 더러운 성격을 다 드러내도 무려 괜찮다.

 

비행 중에는 책 [비엔나 칸타빌레]를 읽었다. 앞에 말했던 이유로 계획을 줄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가이드북은 보지 않는다. 그 장소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과 연이 닿으면 좋고, 보통은 여행에세이 한 두 권 읽고 가는 편이다. [비엔나 칸타빌레]는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과 브람스Johannes Brahms를 테마로 하여 음악평론을 겸하고 있는 방송 작가, 유강호 씨와 피아노를 전공한 여행 작가, 곽정란 씨가 함께 쓴 유럽 5개국 음악 기행문이다. 솔직히 고백을 하겠다. 나는 베토벤과 브람스를 알지만, 사실은 잘 모른다. 그런데 이 책과 이 여행을 통해 조금, 아주 조금이겠지만, 알게 된 것 같다. 읽고 간 또 한 권의 책은 정신과 전문의이면서 오페라 평론가로 활동하는 박종호 씨의 에세이 [빈에서는 인생이 아름다워진다.]이다. [비엔나 칸타빌레]가 나를 빈의 음악으로 안내했다면, [빈에서는 인생이 아름다워진다.]에서는 빈의 미술 세계를 소개받을 수 있었다. 이미 예술의 도시로 알려져 있는 빈이지만 그 정도는 나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는데, 두 권의 책 덕분에 그나마 그 진짜 맛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문학미와 예술미는 훈련을 통해서 커져가고 훈련을 많이 받은 사람이 훨씬 더 맛있게 즐길 수 있다."

유홍준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교수님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여행을 하면서 매번 하게 되는 반성인데, 평소에 열심히 보고 듣고 공부해야 한다. 아는 만큼 즐길 수 있다. 그러니까 내가 에세이를 찾아 읽는 건 여행 직전 단기 속성 코스를 밟는 셈인데, 언젠가 여행을 위해여행서적을 읽지는 않는 경지에 오르기를 바란다. 아직은 내공이 부족한 탓에 앞으로 언급되는 배경 지식의 많은 부분이 앞의 두 권의 책에서 참고한 것임을 미리 밝힌다.